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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승기] 도끼가 왜 롤스로이스를 타는지 알겠네, 레이스 블랙 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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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7.08.09
도쿄에서 경험한 롤스로이스 레이스 블랙 배지의 ‘검은 매력’

롤스로이스 레이스(Wraith) 블랙 배지는 '궁극의 그란 투리스모'라고 할 수 있다. 사진=조두현 기자

지난달 27일 일본 도쿄 롯폰기에서 롤스로이스 신형 팬텀이 공개됐다. 아시아 VIP를 대상으로 은밀히 진행된 이 행사에 한국에선 래퍼 도끼(본명 이준경, 27세)도 초청돼 나타났다. 도끼가 롤스로이스 팬텀의 헤리티지를 보여주는 포토월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동안 한 관계자가 이렇게 귀띔해주었다.
“저희 고객의 평균 연령은 계속 젊어지고 있습니다. 2010년만 하더라도 50대 중반이었는데 지금은 40대 초반입니다. 대부분 자수성가한 사람들로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을 당당히 드러내죠.”
래퍼 도끼는 어릴 적 불우한 환경에서 스스로 성공한 힙합 가수이자 힙합 레이블 일리어네어의 수장이다. 데뷔 후 10년 동안 300개가 넘는 곡을 쓸 정도로 자타공인 끊임없이 노력하는 음악가로 유명하다. 최근엔 본인의 SNS와 각종 매체를 통해 그동안 모은 부를 거리낌 없이 공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차다. 지난 5년 동안 수억 원을 호가하는 럭셔리 카를 열 대 넘게 사고팔았으며, 지금은 일곱 대를 보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엔 롤스로이스 던과 고스트 블랙 배지도 있다. 신형 팬텀의 최종 구매 계약서에 날인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지난달 27일 도쿄에서 열린 신형 팬텀 공개 행사장에 나타난 래퍼 도끼

행사장에서 만난 롤스로이스 중앙아시아 지역 세일즈를 담당하고 있는 김다윗 매니저는 롤스로이스가 고려해야 할 소비자층이 내려간 게 아니라 넓어졌다고 표현했다. 기존의 고객층은 그대로 있고 젊은 층이 새롭게 추가된 것이다. 롤스로이스를 찾는 젊은 고객의 공통점은 급진적이고 도전적이며 본인만의 가치를 찾아 왕성하게 활동한다. 기성세대가 만든 틀에 종속되기보다 자신의 규칙을 만든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히려 성공의 외양을 어엿하게 과시한다. 이들은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 뚜렷하다.
차만큼 오너의 캐릭터와 부의 수준을 한 번에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 또 있을까? 래퍼 도끼처럼 차를 통해 본인만의 색깔을 뚜렷이 나타내고 싶은 젊은 자산가의 입맛엔 롤스로이스의 무한에 가까운 비스포크가 제격이다. 이들은 요구는 명확하다.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과 같은 차를 만들어 달라는 것.
지난 6월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에서 최초 공개된 던(Dawn) 블랙 배지. 사진=롤스로이스 모터카 제공

하지만 기존의 비스포크 방식으론 새롭게 등장한 젊은 층의 입맛을 완벽히 충족시키기 부족했다. 비스포크의 철학이 아무리 고객 중심이라지만 그들의 요청대로라면 롤스로이스 브랜드 전체에도 예상치 못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롤스로이스는 새로운 희구를 가다듬어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블랙 배지가 탄생한 배경이다.
일본의 팬텀 공개 행사장에서 만난 할 세루딘 아시아태평양 기업 커뮤니케이션 총괄 매니저는 “블랙 배지는 단순히 ‘검정 배지’를 단 또 다른 에디션이 아니라 목적과 범주가 기존과 다른 차”라고 설명해주었다. 블랙 배지는 롤스로이스에 새롭게 추가된 고객층의 악동다운 욕망을 극대화해 정제한 변종이다. ‘블랙’이라는 컬러를 선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검정은 죽음 등의 부정적인 뜻도 있지만, 심리적으론 보호를 받는 편안함과 신비감도 안겨 준다.
레이스(Wraith) 블랙 배지의 '검정'은 심오하며 빛났다. 타이어는 블랙 배지 전용으로 새롭게 개발했다

신형 팬텀이 공개된 다음 날, 일본에 있는 롤스로이스 아시아태평양 오피스의 협조를 얻어 도쿄 인근에서 레이스(Wraith) 블랙 배지를 시승했다. 레이스는 고스트를 기반으로 만든 투 도어 쿠페다. 컨버터블 모델인 던과 함께 오너드리븐(Owner driven)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기에 블랙 배지가 더해지니 ‘궁극의 그란 투리스모’ 탄생이다. 국내 판매 가격은 4억6,900만원부터다.
롤스로이스를 상징하는 모든 요소는 '검정'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스 신전을 떠올리게 하는 판테온 그릴과 환희의 여신상 그리고 ‘RR’이 새겨진 로고는 롤스로이스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요소다. 블랙 배지엔 이 모든 것이 검정이다. 뼛속부터 ‘블랙’을 강조하면서 다름을 드러냈다. 혹시 검은색 거울을 본 적이 있으신가? 블랙 배지의 차체가 그렇다. 이토록 깊고 광이 나는 검정은 ‘에이급 전투화’에서도 본 적이 없다. 모든 빛을 흡수한다는 검정이지만, 블랙 배지의 검정은 신기하게도 찬란하게 빛났다.
장인이 손으로 그려 넣은 붉은 코치 라인이 강한 인상과 함께 특별함을 더한다

자료를 찾아보니 차체의 강성은 항공기 수준이며, 수차례에 걸쳐 도색하고 장인들이 일일이 손으로 광을 냈다고 한다. 시승을 마치고 롤스로이스 관계자로부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들었다. 블랙 배지의 메인 컬러는 당연히 검정이지만 고객이 원하면 외관이든 실내든 다른 색으로 맞춰 줄 수 있다고 한다. 과연 한계를 두지 않는 롤스로이스의 비스포크다.
운전석에 우산이 있다는 건 이 차가 오너드리븐에 초점이 맞춰졌단 뜻이다

우아한 승하차를 위해 일반 차와 반대 방향으로 열리는 코치 도어를 열고 실내에 들어서면 그야말로 신세계다. 시승차엔 검정과 빨강 투 톤의 가죽이 스포티하면서도 절제된 느낌을 안겨주었다. 하이라이트는 신형 팬텀의 ‘더 갤러리’를 생각나게 하는 탄소 섬유 장식이다. 0.014㎜ 굵기의 초극세사 알루미늄 실을 탄소 섬유와 함께 퀼트처럼 짜깁기했다. 표면은 여섯 번 래커칠한 뒤 72시간 동안 말렸다가 이 역시 장인이 손으로 광을 냈다. 탄소 섬유 소재를 선택한 이유는 블랙 배지만의 스포티하고 강력한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서다. 안타깝게도 국내엔 인증이 나지 않아 도입이 불가하다.
아날로그 시계 아래에 새겨진 무한대 로고와 예술의 경지를 보여주는 탄소 섬유 패널

블랙 배지의 실내엔 무한대를 상징하는 로고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맬컴 캠벨 경(Sir Malcolm Campbell)의 유산이자 블랙 배지를 선택한 이들의 극한적인 도전 정신을 표현한다. 맬컴 캠벨 경은 1924년 세계 최초의 초고속 기록인 235㎞/h를 달성한 후 1935년까지 열 번이나 기록을 경신한 영국 출신 레이서다. 국왕 조지 5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일본에서 시승한 레이스 블랙 배지의 실내는 '검빨'의 색상 조화로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롤스로이스는 스티어링휠을 잡을 때 일반적인 ‘10시 10분’ 위치가 아닌, ‘8시 20분’ 위치의 아랫부분을 잡길 권한다. 실제로 고스트나 팬텀을 운전해보면 그 위치를 잡았을 때 운전이 가장 매끄럽다. 그런데 레이스 블랙 배지의 스티어링휠은 두 가지 방식 모두로 잡아도 어색하지 않다.
코치 도어는 버튼 하나로 닫을 수 있다. 우아함이란 이런 것이다

사람들의 낯선 시선을 받으며 도쿄 시내를 빠져나와 도호쿠 자동차 전용 도로에 차를 올렸다. 쭉 뻗은 도로를 만나자마자 차의 고삐를 풀었다. 블랙 배지의 에어 서스펜션은 야누스의 얼굴로 새롭게 세트업됐다. 스포티하면서도 ‘매직 카펫 라이드’라고 부르는 매끄러운 승차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6.6ℓ V12 엔진은 최고출력 623마력의 힘을 발휘한다. 이만하면 되었다

이는 스로틀 개폐 정도에 따라 지능적으로 바뀌는 변속 패턴 시스템 덕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스로틀이 25%까지 열릴 때 변속기는 변속 시점을 길게 끌고 가 안정적인 주행감을 선사한다. 스로틀이 80% 열릴 때까지 단계적으로 빠른 변속 패턴을 보이며 박진감을 더한다. 80% 이상부턴 더욱 직접적인 반응을 위해 기어를 바꾸기 전 엔진 회전 속도를 6,000rpm까지 올린다. 물론 계기반에서 이러한 숫자를 볼 수는 없다. 롤스로이스는 엔진 회전수 대신 ‘파워 리저브’를 통해 남은 힘을 보여줄 뿐이다. 6.6ℓ V12 엔진을 얹은 레이스의 최고출력은 623마력으로 이미 더할 나위 없다. 다만 블랙 배지 모델은 팽팽하고 광포한 운전 재미를 위해 최대토크를 7.1kg.m 올려 88.8 kg.m으로 세팅하고 드라이브 샤프트를 새롭게 바꿨다.
변속기에 붙어 있는 'LOW' 버튼은 오프로드에서 쓰는 '로 기어'가 아니다. 다운시프트를 통해 시원하고 유쾌한 주행감을 선사한다

주행 중 브레이크 페달을 밟으면 변속기도 다운시프트를 하며 소소한 안도감을 안겨 준다. 앞 브레이크 디스크의 지름은 일반 모델보다 1in 큰데 이는 빠른 응답을 돕는다. 길이 5,269㎜, 무게 2.5톤에 가까운 거구지만 핸들링은 그 숫자가 떠오르지 않을 만큼 훌륭했다. 스티어링 피드백은 빨랐고 어느 속도에서도 안정적이었다. 고속에서도 레이스 블랙 배지는 조용하고 편안했다.
지붕의 스타라이트 헤드라이너는 낭만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한참을 달려 도쿄에서 약 60㎞ 거리의 카조 시에 있는 ‘와쿠이 뮤지엄’에 당도했다. 이곳에서 롤스로이스와 벤틀리 수집가로 유명한 와쿠이 기요하루 씨를 만났다. 함께 점심을 먹다 그가 내가 타고 온 레이스 블랙 배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롤스로이스라는 브랜드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저겁니다. 그들은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하면 오랫동안 지켜온 브랜드 가치를 존속시킬지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저 차가 그 증거죠.” 와쿠이 기요하루 씨 역시 그 비결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도쿄=조두현 기자 joecho@hankookilbo.com